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
하느님을 유일신(唯一神)으로 섬기고 그의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를 구세주(救世主)로 믿는 기독교(基督敎)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자 서구 문명(西歐文明)의 역사입니다. 2000년 이상의 긴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變化)와 역경(逆境)을 겪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復活)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基督敎思想)의 원천(原泉)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기록된 구약성서(舊約聖書)의 내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Ⅰ. 구약성서 시대
기원전 17세기 경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가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 Canaan)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기근(飢饉)은 계속되었고 삶은 황폐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부여 받은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애굽에서의 400년이나 되는 생활은 수난(受難)의 역사였습니다.
기원전 1446년에 이르러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지만 곧바로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40년의 방랑 생활을 하게 됩니디.
340년의 사사시대(士師時代) 후에 이스라엘은 통일왕국을 이루게 되고 다윗왕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으며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성전(聖殿)을 건설하였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은 이스라엘과 남쪽은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되고,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또다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여러 나라에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배려(配慮)로 인해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지역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占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제국의 지배하(支配下)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유대교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헤롯왕(BC 73년경 ~ BC 4년)을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헤롯왕은 이스라엘 국민의 신임(信任)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헤롯왕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탄생하였습니다.
헤롯왕이 죽은 뒤 이스라엘 땅을 직접 통치한 로마는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反亂)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예수는 그후에 ①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②병자(病者)를 고치고 ③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설법(說法)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당시 로마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要素)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모든 사람이 구원(救援)받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최고의 신(神)이리 믿는 예수는 황제를 절대자(絶對者)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제를 숭배(崇拜)하는 것를 거부(拒否)했습니다.
한편 수천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종교적(宗敎的) 정치적(政治的) 지도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러한 행동이 로마에 대한 대항적 세력(對抗的勢力)으로 간주(看做)되어 로마군이 진압(鎭壓)하러 오게 되면 유대인이 살고 있는 이 땅은 다시 황폐화(荒廢化)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율법(律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잘 지키는 있는데 예수는 이를 다르게 해석하고 율법(律法)에 너무 형식적(形式的)으로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總督)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발하였으며 그는 예수를 십자가(十字架)에 못박아 처형(處刑)하였습니다.
Ⅲ. 예수의 죽음과 기독교의 발생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성경(聖經)에 예언(豫言)된 진정한 메시아이며 머지않아 세상을 심판(審判)하러 오실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유대교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파(宗派)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基督敎) 발생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초대 교회가 세워졌고 예수의 제자들은 세계 각지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傳播)하러 다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과 베드로입니다. 바울은 아시아, 그리스, 로마까지 여러 차례 선교여행(宣敎旅行)을 다니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 또한 아시아, 그리스, 로마까지 선교활동(宣敎活動)을 하였습니다.
Ⅳ. 기독교의 전파와 박해
예수의 죽음이후 그의 부활을 믿는 제자들에 의해 기독교(基督敎)는 세계로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믿는 신자(信者)들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64년 7월에 로마에 대화재(大火災)가 발생하자 당시의 로마황제였던 네로는 이 화재발생이 기독교인 때문이라고 모함(謀陷)하여 기독교인을 심하게 박해(迫害)하였습니다. 이 때에 바울과 베드로도 순교(殉敎)하였습니다. 황제숭배와 민족에 대한 차별을 거부하며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에 대해 네로 이후의 로마황제나 관리들도 지속적인 박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Ⅴ. 기독교 공인
기독교인들이 점차로 확산되자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324년에서 330년 사이에 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改稱)하였습니다.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Ⅵ. 기독교의 확산과 동∙서 교회로의 분열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 기독교교회(Churches of Christ)는 더욱 확산되었고 보편적, 일반적이라는 의미의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교를 가톨릭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콘스탄티노롤리스, 로마 등에 5대교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각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를 주교(主敎 bishop)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가톨릭교회가 가톨릭교회의 대표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라하면 의례껏 로마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 동쪽에 있는 교회란 의미의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 또는 그리스정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정치적인 문제와 교리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Ⅶ. 이슬람교의 등장과 세력 확산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570?~632)는 메카 근처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冥想)을 하던 중 신의 계시(啓示)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신교(多神敎)에 반대하며 유일한 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라고 외쳤고, 신 앞에서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메카의 힘 있는 귀족들은 새로운 종교를 못마땅히 여겨 무함마드와 그의 신도들을 탄압(彈壓)하였습니다.
이에 무함마드는 박해(迫害)를 피하여 622년에 야스리브로 피신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이 해를 기원 원년(紀元元年)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혼란스러운 사회를 정리하고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이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共同體)를 건설하였습니다. 630년,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하였고, 곧이어 전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을 정복(征服)하였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支配下)에 들어갔고 메카와 함께 이슬람의 중요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사(天使)의 인도(引導)로 천국(天國)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이때 무함마드가 디뎠던 발자국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고 믿어 그 자리에 ‘바위의 돔’이라는 이름의 모스크(mosque, 예배하는 건물)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성지(聖地)이자 예수의 활동 무대였으며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Ⅷ.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奪還)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敢行)한 원정(遠征)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十字軍)이라고 부르며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고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인 종교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닌 복합적인 이해 속에서 발생한 전쟁이었습니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重壓)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십자군 원정에 가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Ⅸ. 중세 기독교의 부패와 종교개혁
기독교가 중세 사회의 중심에 놓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교회는 본질적인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성직자(聖職者)들은 부패(腐敗)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황청(敎皇廳)과 가톨릭 교회는 부패한 생활 때문에 재정적(財政的)으로 적자(赤字)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황 레오 10세는 대성당(大聖堂)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免罪符)를 팔았습니다. 이때 사제(司祭)들은 누구든지 회개(悔改)하고 면죄부를 사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면죄부를 사는 순간 죄를 지은 영혼은 지옥(地獄)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교회의 폐단(弊端)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사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습니다. 일종의 항의문인 이 의견서는 교회 정문에 붙인 대자보 수준이었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나중에는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루터의 주장은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게 되며 교회 의식이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성경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부정(否定)이었으며 교황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이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파문장(破門章)을 보냈습니다.
Ⅹ. 개신교의 등장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敎理)와 제도(制度)를 개혁하고자 하는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항의(protest)한다는 의미인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새로운 종파(宗派)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성사(聖事)는 성만찬(聖晩餐)과 세례(洗禮) 두 가지만 하고 교회법을 폐기하여 교회를 신도 중심의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모임으로 한다.
②만인사제(萬人司祭)의 원리에 입각해서 목사와 평신도 사이의 종교적·사회적 차이를 두지 않는다.
③교회는 목사와 신도대표가 자치적으로 운영한다.
④교회제도는 전통과 선호에 따라 감독제도(監督制度), 장로제도(長老制度), 회중제도(會衆制度)를 택할 수 있다.
⑤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각각 독립과 자유를 보장한다.
⑥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누구나 읽고 해석하며 가르칠 수 있다.
Ⅺ. 대표적인 개신교의 교파
종교개혁(宗敎改革) 이후에 기독교(Christianity)는 로마가톨릭교(Roman Catholicism), 동방정교회, 개신교(Protestantism)의 3대 교단(敎團)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改新敎)는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신앙을 형성해 갔으므로 교파의 형성이 쉬웠으며 분열도 잦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개혁운동으로 생긴 개신교(Protestantism)는 독일의 루터교회,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H.)와 칼빈(Calvin,J.)의 운동이 통합되어 생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하는 자유교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등으로 분파되었습니다.
1. 루터교회(Lutheran Church)
루터교회(Lutheran Church)는 16세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改新敎) 교파입니다. 루터교회는 바른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된 순수 복음 운동(純粹福音運動)에서 출발하였으며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 계파 중에 가장 세력이 크고 역사가 오래된 교파입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신학적 배경을 형성하였습니다.
2. 장로교회(長老敎會, presbyterian church)
장로교회(長老敎會)는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 1509 ~ 1564)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개신교 교파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개신교신자의 70% 정도가 장로교회 소속입니다. 장로교회는 교인이 선출한 장로가 당회(堂會)를 조직하고 그 당회가 행정처리를 행사하는 대의 민주 정치 체제(代議民主政治體制)를 가진 교회입니다.
3. 성공회(The Anglican Domain)
성공회(聖公會)는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국가의 주도로 기원한 교회입니다. 역사적으로 성공회는 서유럽에서 로마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신교로 분류하지만 다른 개신교파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성들 때문에 성공회를 개신교와는 별개의 그리스도 종파로 보기도 합니다. 성공회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을 개신교와 다른 것으로 정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4. 침례교회(Baptists)
침례교회(浸禮敎會)는 영국의 청교도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영국 국교회 목사 존 스미스(John Smith 1554?∼1612)입니다. 그는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亡命)했습니다. T.헬위스를 비롯한 망명했던 동지들은 1612년 영국으로 돌아가 침례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침례교회는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크게 퍼져서, 현재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침례교회는 신약성서(新約聖書)의 내용에 따라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乳兒洗禮)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합니다.
5.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감리교회(監理敎會)는 18세기 성공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성공회에서 분리하여 창시한 개신교의 한 교파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교인 7,500만 명 이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로회 다음으로 신도수가 많은 개신교 교파입니다.
6. 성결교회(聖潔敎會)
19세기 말 미국에서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Wesley, J.)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입니다. 기독교인은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완전한 성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성서의 무오류성(無誤謬性)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등을 믿으며 세속적 관습(世俗的慣習)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 이후에 성결운동은 20세기 들어 오순절운동(五旬節運動)으로 발전됩니다.
7. 오순절교회
오순절교회(五旬節敎會, Pentecostal Church)는 방언이나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강조하는 기독교 종파입니다. 이들은 초대 오순절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32년에 설립된 서빙고교회가 최초의 오순절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교회에 속한 교단으로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The Assembly of God of Korea)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로 통합니다.
8. 구세군(救世軍Salvation Army)
구세군은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가난구제, 자선, 사회사업 등을 목적으로 합니다.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습니다.
Ⅻ. 대한민국의 기독교(Christianity in Korea)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2015년 기준으로 개신교 약 980만 명, 천주교 약 380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옴으로 인해 천주교(天主敎)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천주(天主)란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므로 천주교는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라는 명칭보다는 그리스도교, 기독교, 예수교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조선 시대인 1784년에 이승훈이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을 처음 들여옴으로서 시작되었으며 개신교는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선교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천주교(天主敎)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서울, 인천, 수원, 의정부, 춘천, 원주, 대전, 대구, 부산, 마산, 안동, 청주, 광주, 전주, 제주 등 15개 교구(敎區)가 있으며, 그 중 서울, 대구, 광주의 3교구는 대교구(大敎區)입니다.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교를 비롯하여 대학교가 10개교, 전문대학 1개교, 고등학교 37개교, 중학교 28개교, 초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많은 특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의료사업으로는 성모병원(聖母病院)을 비롯해서 종합병원 20개소, 의원 15개소, 의료연구소 8개소, 무료병원 11개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사회사업으로는 양로원, 고아원, 요양원, 나환자수용소 등을 세워 불우어린이와 노인 및 근로여성을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2. 개신교, 그리스도교, 예수교, 기독교
우리나라는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정식으로 선교사업이 시작됨으로써 처음으로 개신교가 전래되었습니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887년 최초로 장로교의 새문안교회가 창립되었으며, 이어 10월에는 감리교의 정동교회(貞洞敎會)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 개신교의 교회는 부산·대구·평양·의주 등지로 확대되어 전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 백과사전,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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